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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환 고문 매경칼럼 게재] 피휘에서 수평호칭까지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02-09 17:06:28

달구벌 대구의 한자 표현은 ‘큰 언덕’이라는 뜻의 大丘였다. 조선의 한 유학자가 성인 공자의 성명이 공구(孔丘)임을 이유로 그 이름 자를 피해 ‘땅이름 구(邱)’를 써서 大邱로 하자고 주장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현재도 그렇게 쓰고 있다. 왕, 성인 또는 부모의 이름에 있는 한자(漢字)를 의도적으로 안 쓰려는 피휘(避諱)의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별칭이 푸른 언덕이란 뜻의 ‘청구(靑丘)’였는데, 1834년 김정호가 작성한 우리나라 지도인 청구도(靑邱圖)에도 언덕 구(丘)가 아닌 땅이름 구(邱)자를 썼다. 건국 이전에 태어난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제외하고 그 후 조선 왕의 이름은 모두 외자이고, 그것도 일반인이 잘 안 쓰는 글자를 일부러 골라서 지었다. 왕의 이름 자를 피해야 하는 피휘가 학문 활동과 백성의 생활에 끼칠 지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이런 피휘가 강하게 작용했지만, 서양에서는 집안의 전통과 명예를 기리고 자랑하고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작명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이름 끝에 2세라는 뜻으로 Jr.(Junior)라고 쓰는 경우도 많다. 미국 프로 골퍼 Davis Love III(3세)는 삼대에 걸쳐 같은 이름을 쓴 경우이니 그의 아버지는 Davis Love Jr. 였다. 또 모계(母系)의 성(姓)을 중간이름(Middle Name)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John F. Kennedy 대통령의 이름 중 F는 외갓집의 성 Fitzgerald의 첫 글자이다.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친가, 외가나 조상의 이름 중에서 하나씩 따오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관습이었다. 아랍이나 인도에는 자신이 믿는 예언자나 구세주의 이름을 따온 무함마드, 모세 또는 예수(Jesu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같은 동양 문화권이지만 일본에서는 피휘 대신 조상의 이름 중 한 글자를 그대로 물려 받아쓰는 통자(通字)의 전통이 있다. 일본 천황의 이름은 ‘히로히토(裕仁)’처럼 ‘어질 인(仁)’자를 1392년부터 현재까지 대대로 물려받아 쓰고 있다.

 

이름에 대한 이런 문화의 차이는 호칭에서도 차이를 가져온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아직도 자신보다 연장자나 상급자를 부를 때 그의 이름을 바로 말하기는 거북하다. 그래서 현재나 과거의 직책이나 직급에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이 편안하다. 직급이나 직책이 없거나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름에 ‘선생님’이라는 경칭을 조심스럽게 붙여 부른다. 반면 서양에서는 어느 정도 친해지면 Mr. 또는 Ms. 등의 경칭을 붙이지 말고 이름만 불러 달라고 먼저 요청한다. 회사나 관료 조직에서 Mr. President, Mr. Chairman, Madam Chairman, Mr. Secretary(장관), Mr. Ambassador(대사)라 호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딱딱한(Formal) 경우이고, 사적으로는 다정하게 이름이나 애칭을 불러 주길 원한다.

 

같은 미국이라도 ‘Southern Hospitality’로 유명한 미국 남부 사람들은 자신보다 연장자이거나 상위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Sir 또는 Ma’am(여자)으로 부르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시키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Sir라는 호칭은 화자(話者)가 상대방보다 지위가 낮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므로 국제 비즈니스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쓰지 않는게 좋다. 따라서 미국이나 서양의 고급 음식점에서 웨이터를 부를 때 단순히 ‘Excuse me’라고 하면 될 것을 Sir 또는 Ma’am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한국 초국적기업의 임직원이 국제 비지니스에서 호칭과 관련하여 자칫하면 실례를 범하므로 조심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Mr. Ms. 등 존칭은 성(Last Name) 앞에 붙여야 하는데 가끔 혼동해서 이름 앞에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대방에 대한 큰 실례이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에게 “Mr. Michael”이라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또 자신을 소개할 때, “I am Mr. Kim” 같이 자신의 성에 경칭을 붙이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오류이다. 명함에서 “Hong Gil Dong” 처럼 한국 성명 순으로 적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Gil Dong Hong” 이라 하던지 아니면 “Hong, Gil Dong”이라 하여 성 다음에 컴마(,)를 넣어야 한다.

 

세계 각국마다 약간씩 다른 호칭 문화가 있다. 국왕, 연방 수상이나 주정부의 수상, 장관, 주지사, 판사, 국회의원들에게 관용적으로 쓰는 경칭을 잘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예컨대, 공식 모임이나 서한에서 ‘The Honorable’ 이라는 경칭을 붙이는 예로는 대통령, 수상, 장관, 연방 상하의원, 대법원 판사, 주지사 등이다. 인도나 영국 등 전통적 영어를 쓰는 나라의 국왕, 내각 수반이나 수상과 직접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를 지칭할 때 Your Majesty, Your Excellency, Your Highness등 극존칭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인도 주(州) 수상과 면담할 때 한 기업의 대표가 수상의 성에 그냥 Mr.만 붙여서 호칭하니 인도 측에서 상당히 불쾌해 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은 어떤 이름은 영어식으로만 발음하지 말고 그 이름이 나온 원어대로 발음하도록 사전에 체크해야 한다. 친밀하고 다정하게 보이려는 제스처인데 발음을 틀리게 하면 효과가 없다. 예를 들어 스페인 사람인데 그의 이름이 Jose라면 영어 식으로 ‘조세’라고 부르지 말고 ‘호세’라고 불러야 하며, 프랑스식 이름으로 Angel이라면 ‘엔젤’이 아니라 ‘앙헬’로 불러야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피휘는 이미 물러갔고, 기업 조직에서 기존의 직급 또는 직책 뒤에 경칭 ‘님’을 붙이는 것도 점점 밀려가고 있다. 기존의 회장님, 사장님, 본부장님, 과장님 대신에 ‘이름+님’ 또는 애칭이나 영문 이니셜로 부르는 것이 ‘수평적 호칭’이다. 최고 경영자로부터 말단 사원까지 수평적 호칭으로 부르라는 변화가 벤처기업 뿐만 아니라 국내 제일의 기업 집단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비록 님 자를 붙인다지만 상급자나 최고 경영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서구 문화권처럼 쉽게 술술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평적 호칭의 정착으로 자유로운 소통문화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표현되는 기업문화를 지향하는 것이니 일단은 수긍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 호칭의 변화를 선도하는 기업의 노력은 비장한 결단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기업은 생존을 위해 MZ 등 젊은 세대와의 원활한 소통과 그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고, 기존의 수직적 호칭이 가져올 세대간 소통 단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공 기관의 캠페인이 아닌 사기업의 이런 노력이 본래 의도한 효과를 거두려면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사회적 패러다임 변화가 기본 배경으로 깔려야 한다.

 

첫째,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압존법(壓尊法)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내가 지칭하는 대상이 말하는 나에게는 높여야 할 사람이지만 듣는 상관에게는 아랫사람일 경우에 높임말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압존법이다. 예를 들어, 김 일병이 이 병장에게 “박 상병이 어디 가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이 병장한테 엄청 혼났다. 우리 정부는 이런 압존법을 폐지한다고 발표하였으나, 아직도 공사 조직에서는 어정쩡하게 지켜지고 있다. 이런 문화가 우선 완전히 없어져야 수평적 호칭이 자유롭고 완전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사원이 공식 회의 석상에서 기업 총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지기 위한 기반 조성이다.

 

두 번째로, 기업의 보수나 승진제도에서 연차에 기초한 호봉제나 연공서열순 승진이 아니라 철저하게 직무 및 성과에 따른 급여체계와 능력과 실적 위주의 승진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정부에서도 이점을 인지하고 연공형 임금체계를 쓰는 기업에 대해서는 ‘세제 디스인센티브’를 쓸 방침이라 하니 좀 기대가 된다. 특히 동일 환경에서 동일작업을 하는데 호봉제가 적용되어 급여에 차이 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나라 초국적기업들이 운영하는 미국내 생산공장에서는 생산직의 근속년수에 상관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다 온 것은 아니다. 수평적 호칭이 조직 구성원 간의 존경과 배려를 해치지 않고 위 두가지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정착될 때 기업의 국제화와 경쟁력 향상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기사원문: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피휘에서 수평호칭까지 - 매일경제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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