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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환 고문 매경칼럼 게재] 협상에는 가끔 치킨게임도 필요하다!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3-03-30 10:42:03

협상은 삶의 일부이다. 물건 값 흥정에서부터 기업의 국제계약 그리고 국가의 외교적 담판까지 모두 협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협상가가 되길 바라며 협상의 기술 내지 협상의 전략 등을 알고 싶어한다. 협상전략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문가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의 저자 스튜어트 다이아몬드(Stuart Diamond) 와튼 스쿨 교수이다. 무언가 특별한 비법을 기대하고 그 책을 읽으면 실망한다. 그 책에서 협상의 12가지 전략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경험하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아보기 어려운, 즉 즉각적으로 와 닿지 않는 평범한 일반적인 원칙과 전략 아닌 전략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목표에 집중하고, 감정에 신경 쓰고, 점진적으로 접근하며, 의사소통에 만전을 기하고, 절대 거짓말을 하지 마라” 등은 아주 일반적인 협상의 기본 자세이다. 그러나 강압적 수단을 쓰거나 직설적 설득을 하지 말고, 상대방이 스스로 원하는 해결책을 내 비칠 때까지, “상대가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며, 상대방이 중히 여기는 가치와 명분을 염두에 두고, 상대방의 표준을 존중하며 활용” 하는 등 인내력을 바탕으로 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한다. 그런 노력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핵심이며, 최종적으로는 가치가 다른 대상을 서로 교환하면 그것이 협상의 타결이다. 이런 전략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훌륭한 협상가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협상가를 꼽으라 하면 역시 고려 성종 때의 서희(徐熙, 942~998)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거란 군이 침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고려 땅의 일부를 할애해주고 항복하자는 조정의 다수 의견에 반대하여 홀연히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에 나섰다. 서희는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가 생각하는 그림과 그가 중히 여기는 가치를 파악하여 협상을 성공시켰다. 그 결과, 거란군은 철수하였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 고구려의 옛 땅 6개 고을을 얻었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 협상의 교본에서 말한 12가지 전략을 1,000 년 전에 이미 모범적으로 실행해 보인 것이다. 우리 외교부도 그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고자 청사의 한 행사장을 ‘서희 홀’이라 명명하였다. 외교부의 국익을 위한 협상이든 초국적기업의 비즈니스 협상이든 기본 자세와 전략은 다이아몬드의 책에서 언급된 것들이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다만 외교 협상과는 달리, 문화 차이가 있는 초국적기업의 비즈니스 협상에서는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한다면 협상을 좀 더 순조롭게 진행시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초국적기업에서 협상은 흔히 상이한 문화를 가진 상대방과 일어난다. 이른바 ‘Cross Cultural Negotiation’이다. 서구 문화권의 초국적기업 협상팀과 한국, 일본 등 동양권 문화의 협상팀이 맞붙은 경우, 협상 진행에서 그 태생적 문화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서구 협상팀은 잘 짜인 논리를 가지고 와서는 공격적 설득 전술을 써가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한다. 반면 동양권은 공격적인 설득에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이를 표출하지 않고, 면전에서 Yes 인지 No 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고 우호적인 협상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시간을 끌다가 상대방이 초조해지는 시점이 오는 순간에 치킨게임(Chicken Game)을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제안을 하여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치킨게임은 경영학에서 협상이론의 하나로 다뤄진다. 즉, 협상의 상대방이 합리적 의사결정과 행동을 할 것이고, 또 협상의 결과가 당사자의 행동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경우라면 협상에도 게임이론은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게임이론에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와 ‘치킨게임’이 있는데, 협상의 양 당사자가 서로 소통하면서 협조한다는 점에서 치킨게임이 협상의 한 유형으로서 인용되고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킨게임과 다르다. 협상에서 나타나는 치킨게임의 양상은 이렇다. 양 당사자가 서로 양보없이 정면 충돌할 듯이 팽팽히 대결하다가, 막상 정면충돌한다면 둘다 파국이므로 마지막 순간에 일방이 먼저 양보하여 파국을 막고, 곧 이어 상호 타협으로 협상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치킨이란 닭고기가 아니라 겁쟁이라는 뜻이다.

 

약 22년 전, 자동차 업계의 초국적기업 H사는 북미 시장을 더욱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미국 남부에 공장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글로벌 넘버 원 컨설팅사는 입지조사와 분석 결과 K주가 제일 유리하다고 추천하였고, 최고 경영층도 그렇게 판단하였다. K주에 공장을 짓기로 내정한 상태에서, 그 투자의 대가로 받게 될 여러가지 인센티브에 대한 K주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의 신속한 진행과 최대한의 인센티브를 받아내려는 전략으로 K주와 경쟁적 관계의 이웃 A주를 보란 듯이 같은 장소로 함께 불렀다. 하루는 K주, 다음 날은 A주로 번갈아 가며 협상을 진행하였다.

 

사실 A주는 협상 결렬 시 사용할 대안, 즉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였는데 막상 협상을 시작해보니 여러가지 제시 조건에서 A주가 K주보다 더 유리했다. K주는 이미 일본 최대의 자동차 초국적기업 T사의 공장을 유치하였고, 산업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어 아쉬운 게 없는 상태였다. 반면 A주는 미국내 가장 가난한 주의 하나로서 실업률이 두 자리수인 최악의 상태였고, 그 해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주지사는 재선을 위해 투자유치 실적이 급했다. 결정적으로 K주가 제시한 부지의 수용에는 시간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H사는 K주를 Drop 하고, BATNA였던 A주와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투자계약서 사인 및 기공식 날짜도 잡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공장부지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A주는 사유지를 수용해서 H사에 99년간 연 1달러에 임대하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필자는 ‘내 땅은 내 명의로 등기되어 있어야 안심이 된다’는 농경민족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99년 임대는 뭔가 불안하니, 소유권을 무상으로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A주 변호사는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면서 그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A주 헌법상 사유지를 공공기관이 수용해서 사기업에서 무상으로 소유권을 넘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필자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주의 헌법을 고치세요.” 이 말에 자존심 상한 A주 협상팀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퇴장해 버렸다.

 

말없이 팽팽한 대결의 치킨게임이 시작되었다. 투자유치 실적에 목 마른 A주는 그 협상 테이블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우리는 호텔에서 무료하게 기다렸다. 며칠 후 A주 대표 투자청장이 은밀히 호텔로 찾아와 필자에게 제안했다. “주 헌법을 바꾸려면 법 절차상 주민(州民) 투표를 거쳐야 하고 그것이 통과될 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투자계약서에는 99년 리스(임대)로 하고, 주민투표 결과 헌법이 개정되면 소유권을 무료로 이전해 주겠다는 단서 조항을 달고 마무리하자.” 거부할 수 없는 합리적 제안이었다. 그는 땅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였고 최종적으로 가치가 다른 대상 즉, 토지소유권과 투자유치를 교환함으로써 치킨게임의 정면충돌을 피한 훌륭한 협상가였다. 그렇게 투자계약은 타결되었고, 3개월 후 주민투표 결과 주 헌법이 개정되어 H사는 해외투자 역사상 가장 큰 땅덩어리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일시에 이전 받았다.

 

H사 투자유치 협상 사례에서 K주가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적 컨설팅 회사가 추천했고 일본의 T사 등이 이미 자신의 주에 투자했으니 H사 또한 반드시 K주로 올 것이라고 과신한 것이었다. 또 H사의 BATNA인 A주에 대해서는 부실한 분석을 하고 너무 안일하게 협상에 임했다. 반면 A주는 한국인의 땅에 대한 정서를 이해하였고, 다이아몬드 교수의 말처럼 가치가 다른 대상을 교환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투자유치 협상에 임한 것이 성공의 원인이었다. 합리적 사고의 협상 상대방에게는 가끔 치킨 게임을 마다하지 않는 듯 단호한 면을 보일 때도 필요하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기사원문: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협상에는 가끔 치킨게임도 필요하다! - 매일경제 (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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