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환 고문 매경칼럼 게재] 주재원의 자격

[진의환 고문 매경칼럼 게재] 주재원의 자격

초국적기업 해외주재원은 꼭 착한 사람이어야 하나?

1996년에 방영된 주말 연속극으로 ‘목욕탕집 남자들’이 있었다. 극중 목욕탕집의 한 남자가 직장에서 인도 주재원으로 발령 났다고 하니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다. 특히 목욕탕집 여자들이 더 난리였다. 후진국 인도에 왜 가냐는 등 극중 여자들의 인도에 대한 묘사는 비록 사실적이었지만, 공영방송의 대사로는 적절하지 않게 인도를 폄하하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인도 공장 건설 프로젝트 선발대의 일원으로서 파견되었다가 잠시 귀국해서 그 드라마를 보고 경악했다. 걱정대로 그것의 부정적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회사의 필요에 의해 인도 주재원으로 나가야 할 직원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기피하기 시작했다. 능력과 전문성을 인정 받은 주재원으로서 ‘회사와 국가경제를 위해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운다’라는 대의적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인재의 확보가 어려워졌었다.

현재 한국에서 인도에 파견된 초국적기업 및 중견기업의 주재원은 몇 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근무지를 지키며 현지 사회에서 한국 주재원의 강건한 애사심과 현장 중심 경영의 신뢰성을 입증해 보였다. ‘목욕탕집 여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인도가 이제는 달리 인식된다. ‘주재원 남편을 따라 인도에 갔다 온 부인은 네 번 운다’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인도 주재원 발령 나서 울고, 인도에 처음 도착해서 울고, 그런데 적응해서 살다 보니 너무 좋은 데 귀임 발령이 나니 가기 싫어서 울고, 한국에 와서 청소, 빨래 등 인도에서는 메이드에게 시키던 일을 직접해야 하니 서글퍼서 운다는 우스개 소리이다.

기업의 해외 주재원(駐在員, Expatriate)이란 일정 기간 해외법인 또는 해외 사무소에서 특정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임직원을 말한다. 주식회사에서 해외 파견 주재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 먼저 인도 및 동아시아와의 무역을 위해 1600년에 설립한 것이 영국의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이다. 이 회사는 비록 합자회사의 형태이지만 영국 국왕으로부터 무역의 독점권 뿐만 아니라 조약 체결 그리고 용병을 이용한 전쟁 수행 등의 특권을 부여 받은 회사였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영국과 같은 대규모 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서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투자금을 받아 조달하였고, 그 증표로 주권을 발행하였으니 그것이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또 그 주식의 거래를 쉽게 하기 위해 1609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가 출범하였다. 17세기 전성기 때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직원 5만명 그리고 용병 1만명을 가진 거대 조직으로서 주식 액면가의 약 40%를 배당금으로 주는 초 우량 기업이었다.

당시 영국 및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 파견된 주재원은 무역의 첨병이었으며 때로는 국익을 위해 현지인을 이끌고 전쟁까지 수행해야 하는 막중하고도 위험한 보직이었다. 따라서 그 때나 지금이나,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기존 시장이든 신규 개척 시장이든 상관없이, 해외에 파견되는 한 주재원은 맡은 바 고유 직무를 넘어 본국 및 본사의 대리인이기도 하니 능력과 리더십이 출중한 임직원이 지원하고 선발되어야 한다. 즉, 해외 주재원은 영어 등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기본이고 담당 업무를 충분히 잘 수행할 것이라고 확신을 주는 경험과 경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역사와 문화가 다른 현지인을 잘 리드하여 초국적기업의 핵심 가치를 전파해야 하므로 출중한 리더십과 해외 생활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마인드를 가진 임직원이어야 한다.

초국적기업의 해외 주재원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고유 업무가 따로 있지만 그 외에도 해외 근무 중에 함양하여야 할 공통적인 역량이 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한다면 이렇다. 주재원은 한국적 정체성에 기반한 사회통념 또는 전통적 마인드에서 한 단계 진화하여 주재국 또는 국제적 사회통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또 커뮤니케이션 스킬에서는 일반적, 직설적 소통 능력에서 전문적, 우회적 소통 능력으로 자신의 역량을 계발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업무 능력에서는 개개의 나무만 보는 관찰자적, 실무적 마인드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전체 숲을 파악할 줄 아는 분석적 마인드와 솔루션을 제안할 수 있는 경영자적 능력을 지향하여야 한다.

실제로 해외 주재원으로서 근무하다 보면 자연히 담당자의 관점이 아닌 법인 전체의 이익과 안정적 운영을 고려하는 경영자적 관점으로 어느 정도 진화하게 된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한 초국적기업의 해외주재원 인사규정은 주재원의 직무에 관하여 이렇게 명문화했다. “주재원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적극적인 자세로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 회사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해외 주재원은 본사의 핵심가치를 전파하며 현지에 맞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일구고, 본사와 해외 지사의 이익과 이미지를 지키는 공통적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리자이지만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선량한 관리자’ 이다. 즉,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의무(善管主意義務)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주재원의 직무이다.

법률 용어로 ‘선량한 관리자’란 착한 관리자가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추상적 평균인’을 의미한다. 즉 주재원으로서 평균적인 경험, 판단력, 업무 지식 등을 갖춘 자가 선량한 관리자이고, 그에게 기대되는 일반적인 주의(注意) 정도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부장급 주재원이 그의 전형적 업무가 아닌 상황에서 고의는 없었으나 무언가 크게 실수하여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가상해 보자. 이런 경우 그 주재원이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의무를 다했는가에 따라 그의 책임 여부가 판단되는 것이다. 즉 부장급 주재원이라는 직급의 경험과 통상 평균적으로 요구되는 직무상 능력으로 판단해 볼 때, 그에게 기대되는 주의의무를 가지고 일을 했다면 책임이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과실이 인정되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주재원은 그 직급과 업무에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부임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재원 부임 전 몇 년간의 업무 및 능력평가 평균이 ‘중’ 이상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결론적으로 주재원은 자신의 업무 기술서에 없는 일이라도 회사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판매 담당자가 전산실에 갔더니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 실내 온도가 높아진 것을 알았고 이를 방치할 경우 전산 서버가 과열로 작동을 멈추거나 화재가 나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상 또는 업무상 익히 알 수 있었던 것이라면, 비록 전산 담당자가 아니지만 즉시 신고 등의 조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초국적기업이라 해도 선량한 관리자가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 회사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1602년 동인도회사 때부터, 해외 주재원 근무는 그것을 통해 업무능력과 리더십을 크게 함양하여 궁극적으로는 경영자적 자질을 갖출 수 있는 경력 관리상 절호의 기회임은 초국적기업의 많은 케이스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기회는 남들이 잘 안 가는 길 속에 숨어 있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기사원문: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주재원의 자격 - 매일경제 (mk.co.kr)